어제 우리학교(포항공대) 4대 총장이셨던 박찬모 교수님 은퇴 기념 사은회가 있었다.  가상현실 연구실(VR Lab) 지도교수님이기도 하셨기 때문에 그 밑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졸업생으로서 참석했다. 사실 그런 인연이 아니고서는 - 물론 교수님께서는 날 기억못하실테지만 - 감히 끼어들 만한 자리가 아니다. 이분은 우리나라에 전산학과(컴퓨터공학)를 처음으로 설립하고 가르치신, 말 그대로 한국 컴퓨턱공학의 역사 그 자체시니까 (1세대가 아니라 1세대를 가르친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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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내외분께 꽃다발 증정. 꽃향기가 참 좋았다는데 향을 맡아볼 기회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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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크 커팅. 주위에 시립한 분들은 1대 제자들(당연히 죄다 KAIST 교수). 오른쪽에서 두 번째, 키가 큰 분이 대학원 당시 내 지도교수셨던 김정현 교수님. 지금은 고려대에 계시다.


사회를 맡은 남규형이 교수님의 약력을 줄이고 줄여서 발표했지만...... 약력 제목만으로도 두 페이지가 넘는다더니 정말 말이 안 나올 정도였다. 여태껏 정통부장관을 안하신게 이상할 정도. 

식사 후 교수님께서 직접 준비한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과 함께 당신의 지나온 길을 말씀해 주셨다. 90장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라서 그중 정말 보기 힘든 교수님의 옛날 사진들을 찍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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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부산 피난지에서 경기고를 다니셨다.(왼쪽 위 사진에 나오지만 천막을 교실삼았다고 한다). 오른쪽 사진은 수석졸업생 답사 장면을 찍은 것으로 신문에 실린 것.


부산에서 경기고 수학반을 만들어 중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정근모 전 정통부장관도 그 중 한명이었다고 한다. 워낙 머리가 비상해서 뭘 하나 가르치면 다음시간에나 나올 내용을 물어보는 바람에 애를 먹으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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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통역(16살의 고등학생이었는데!) 일로 출입한 미군부대. 한국사람 차별당하는 것을 보면서 쏟은 눈물이 배어들은 곳이라고 회상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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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화학공학과 시절 사진. 그땐 워낙 마른 몸이라서 턱이 뾰족해 붙은 별명이 '송곳' 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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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을 가기 위해 자원입대. 대학생들은 군대에서 엄청나게 굴림을 당했다고. 그리고 1959년 미국 유학길에 비행기 앞에서 찍은 사진.


이승만 정부 시절에는 대학생이 군복무를 하면 유학자격을 주는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쁜 시력에도 불구하고 우겨서 입대하셨다고. 군대에서 하도 괴롭히는 하사관이 있어 참다 참다 못해 "우리 나갈때 저놈을 죽이고 나가자" 라고 이를 갈 정도였는데 막판에는 그 하사관이 "나는 집안형편때문에 대학을 못가고 군대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학생만 보면 그렇게 시샘이 나고 미워서 괴롭혔다. 그동안 미안했다" 라고 속을 털어놓는 바람에 나가기 전에 각자 모금을 해서 줬다고 한다.  그만큼 어려운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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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공학을 전공하셨는데 컴퓨터의 길로 바꾸게 된 계기가 된 IBM 미니컴퓨터.


화학공학도로 유학을 시작했지만 교수를 따라서 컴퓨터 세션에 참가한 게 인생의 진로를 바꾸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계산기로 몇년을 두드려 연구결과를 내던 걸 몇시간만에 해치우는 기계에 매료되지 않으실 수 없었다고. 그 당시 IBM 704 컴퓨터가 군시설 안에 있어서 한국인은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항상 교수가 데리러 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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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도중 한컷. 숙연하면서도 교수님 특유의 유머로 웃음이 끊이지 않은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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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미국에서 교수로 확고히 자리를 잡으셨지만 귀국해서 과학기술대(KAIST)에 합류. 전산학과를 만드셨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1973년 귀국. 그 때 많은 과학자들이 박정희 정부의 설득에 의해 조국을 살리자고 마음먹고 돌아왔다. 아무튼... 그때 전산학과를 만들고 강의를 시작하셨는데, 그당시 제자분이 회상하시기를 "나는 학부때 전자공학을 전공했는데 트랜지스터도 아니고 진공관을 배웠지. 그런데 여기(KAIST)에서 박찬모 교수님 수업을 들으니 마이크로프로세서를 가르치고 아키텍쳐 이야기를 하시는 거야.  당시에  대한민국에서 그런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었어요" 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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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이 처음 구입하신 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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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포항공대. 김호길 초대 총장님과 약속한 것 때문에 갈 수 밖에 없었다고 웃으신다.


KAIST에 계시다가 개인사정으로 미국에 돌아가셨다. 그리고는 포항공대가 설립되자 다시 귀국해서 은퇴할 때까지 계신다. 이게 다 故 김호길 총장님과의 인연 때문으로, 두분 다 재미과학자협회 회장을 맡아 활동하는 등 미국에 있는 한인 과학자 사회에서 상당한 위치에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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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공대에서 계신 말년에는 계속 남북한 컴퓨터 학계의 협력활동에 매진하셨다.


내가 가장 놀란 건 박찬모 교수님께서 남북한 전산학계의 교류를 위해 노력하신 일이다. 미국국적을 버리지 않으신 이유 중 하나도 북한과 쉽게 교류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예전에 학교에서 특강을 하실때 "언젠가 통일이 될 텐데 남북한의 컴퓨터학계가 미리부터 교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한글 처리 문제 등 산적한 과제가 많아요" 라고 하신 걸로 기억한다. 이 분 정말 훌륭하신 어른이구나 하고 느꼈던 때가 그 날 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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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두 번 결혼했어요. 1961년에 컴퓨터와 한번, 그리고 63년에 지금 와이프랑 결혼했지"


그당시 박교수님을 컴퓨터 강좌에 데려간 교수가 "일생일대의 실수를 했다" 라고 농담을 던졌다고 한다.  "컴퓨터와 먼저 결혼을 했어. 밤마다 같이 잤으니 그게 결혼한거지 뭐야" 라고 농담처럼 말씀하시지만 그 한마디 안에 숨어있는 각고의 노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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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제자분들과 기념촬영


솔직히 교수님 정도 되시는 분은 나중에 전기(평전)가 나와도 될 위치이시다 (그런 분의 연구실에 있었으면서도 잘 모르고 살았으니 나도 참 할말이 없다) 학자로서도 충분히 업적을 남기셨고 교육가, 교육행정가로서의 업적은 더욱 더 탁월하셨다. 말년을 바치다시피 하여 남북한 전산학계의 교류에 노력하시는 모습을 볼 때면 이분이 정말 일흔이 넘은 분이신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남은 생애 동안 뜻하신 바를 꼭 이루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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